[2026] 고유함이 피어나는 곳, 제천 ᴺᴱᵂꜝ
장소 | 조이가든, 계절을 담은 하루, 엽연초 하우스, 우주산책, 책방 소설, 금수산힐링체험센터, 녹는점
함께 해주신 분들 | 그담, 조약돌, 윤마디, 리마, 만두
Intro.
지난 6월 19일, 평면도 스튜디오 에디터들이 제천으로 1박 2일 워크숍을 다녀왔다. 제천의 로컬 기획자로서 ‘사부작 乙’과 ‘계절을 담은 하루’를 운영하며 이번 전체 여정을 준비해 준 노을씨는, 자신의 제천 정착기 썰을 푸는 도중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 속도에 맞춰가려고 해요.”
그녀의 말은 이번 제천에서 만난 여섯 공간, 그리고 그 공간지기들의 삶과 묘하게 겹쳤다.
나만의 속도, 나만의 가치, 나만의 방식, 나만의 취향을 좇는 사람들.
이번 워크숍에서 만난 공간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고유함이었다.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방식은 스케치북을 꺼내 눈에 담은 것들을 선과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걸로도 모자라, 번거롭게 왜 그림까지 그리냐고? 손이 느리면 눈이 더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도 자세히 보게 되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한 조각 기억으로 남아, 언젠가 삶이 힘들 때 꺼내볼 수 있게 된다.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나는 그게 좋다.
이번 워크숍의 키워드처럼, 그렇게 나만의 고유함이 담긴 방식으로 이 여정을 스케치로 남기며 제천을 기억에 새겼다. 아래는 제천에서 만난 여섯 공간의 이야기다.
#1. 조이가든 x 계절을 담은 하루
우리가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이가든’이었다. 입구에 놓인 작은 입간판이 우리를 먼저 맞았다. 손으로 직접 쓴 환영 인사였다. 우리를 그저 지나가는 손님 중 하나가 아니라, 미리 이름까지 적어두며 기다리는 귀한 손님으로 생각해주는 공간지기의 고운 마음이 느껴졌다. 환대는 그렇게 조이가든의 문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볼거리 가득한 조이가든의 공간을 여기저기 구경하다보니 곧 노을씨가 준비한 ‘계절을 담은 하루’의 밥상이 차려졌다. 자신이 소중하게 가꾼 공간을 기꺼이 내어준 어른과, 그 공간에서 자기만의 소중한 가치를 펼치는 청년. 각자의 소중함을 존중하며 포갠 두 세대의 협업이 계절밥상 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밥 위에 콩이 소복이 올라간 콩 카레가 먼저 눈에 띄었다. 완두콩, 병아리콩 등 다양한 콩과 함께 그 일부는 부드럽게 갈아 만든 카레였다. 일반 카레와는 달리 맵지 않고 슴슴한, 자연스러운 맛이었다. 한식으로 재탄생한 참외 라페와 구워서 더 달달해진 채소들과 옥수수, 두릅나물이 함께 페어링 되었다. 모든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아 서로 어울렸고 그 맛이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식사를 마칠 무렵, 수박화채가 등장했다. 커다란 수박을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낸 후 껍질 그대로 그릇으로 삼고, 동그랗게 도려낸 수박 과육과 앵두가 가득 담겼다. 그릇까지도 통째로 제철인 한 상. 여름 한 철에만 허락되는 호사다. 제철 재료로 그 계절에만 낼 수 있는 상을 차리는 일. ‘계절을 담은 하루’라는 이름 그대로였다.
정성스런 계절미식이 준비된 이곳, 조이가든은 자매인 공간지기들이 60년 된 친정집을 고쳐 만든 곳이다. 3년쯤 비어 있던 집을 열 달에 걸쳐 손보면서 되살렸다고 한다. 수익을 내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취미로 시작한 셈이었는데, 이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며 자연스레 지금에 이르렀다는 공간지기의 말이 이어졌다.
인상 깊었던 건 공간지기가 ‘존엄’이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였다. 젊은 사람은 어디서든 존중받지만, 나이 들거나 약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고 했다. 특히 대중목욕탕이 그랬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모양이 달라지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벌거벗은 몸이 낯선 이들 사이에 그대로 드러나는 그 자리에서는 어쩐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가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공간지기의 그 마음은 조이가든의 욕실에 그대로 담겼다. 이곳의 욕실은 서둘러 씻고 나오는 기능적인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장소였다. 문을 닫으면 오롯이 혼자가 되는 사적인 공간. 늙거나 불편한 몸을 부끄러워하며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맞아들이는 공간이다. 공간은 이렇게 그 사람의 철학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욕실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 실례가 될까 싶어 사진으로 담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다시 떠올리다보니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조이가든의 정원도 공간지기의 철학을 토대로 가꾸었다.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자리를 여러 층으로 나누어 식물들끼리 서로 숨 쉴 틈을 두고 바람이 지나가도록 심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정원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진다. 공간지기는 마음에 드는 꽃모종을 주변에 아낌없이 나눠주기도 한다. 그 후한 마음은 온라인에서도 이어져 당근마켓 매너온도가 80도에 이를 만큼 ‘믿고 거래하는 이웃’으로 통한다고 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 그대로를 공간과 음식으로 빚어낸 자리.
계절을 담은 하루와 조이가든이 제공한 첫 시간은, 이번 여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미리 귀띔해주는 것 같았다.
#2. 엽연초하우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제천의 원도심인 명동 한복판에 자리한 카페 및 게스트하우스, ‘엽연초하우스’였다. 엽연초(葉煙草)는 잎을 자르지 않고 통째로 말린 잎담배를 말한다. 제천은 한때 전국에서 손꼽히는 잎담배 산지였고, 이 근방에는 담배를 사들이고 저장하며 값을 매기던 시설이 모여 있었다.
엽연초하우스 건물 바로 옆에는 그 시절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1918년에 지은, 근대의 멋을 그대로 간직한 엽연초생산조합 구사옥은 국가등록문화재 65호로, 1943년에 지은 ㄱ자형 목조건물인 수납취급소는 잎담배를 받아 갈무리하던 곳으로 국가등록문화재 273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영화 <군함도>의 일부 장면이 이 수납취급소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근대 산업과 일제강점기의 그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의 시간이 이 일대에 겹겹이 쌓여 있는 셈이다.
엽연초하우스 건물은 그보다 뒤인 1977년부터 제천엽연초생산협동조합의 사무실이자 작업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구도심에서 점점 빠져나가고 건물이 비게 되자, 제천시가 2018년 도시재생활성화사업으로 이 건물을 사들였다. 이후 여행업에 오랫동안 종사한 천명주 대표가 공간지기가 되어 리모델링을 거쳐 1층은 카페로,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여행업에서 그가 쌓아온 감각이 이 낡은 건물을 되살리는 데 그대로 쓰인 것이다.
1층 카페는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에 들어서면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담뱃잎을 갈무리하던 건물이 이제는 초록을 들여 이렇게 쉼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게스트하우스가 등장한다. 2인실부터 4인실까지 총 8개의 객실이 자리하고 있다. 텅 비어 있던 커다란 공간을 칸을 나누어 만든 방들로, 곳곳에 오래된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다.
엽연초하우스가 특별한 것은 ‘함께 잘 사는 방식’을 고민하는 공간지기의 진심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공간지기는 도시재생시설로 사실상 수익을 내기는 어려운 구조라 솔직하게 밝혔다. 몇 안되는 객실만으로 공동화된 도심에서 커다란 건물과 고용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는 벅차기에, 결국 사명감으로 버티는 사람만 남는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이 공간을 지키는 이유를 그는 ‘상생’이라는 말로 풀었다.
“공장에 취업하면 장애인들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게 현실이거든요. 저희는 임금 외에도 여러 혜택을 제공하려고 해요. 그게 도시 재생이 바라는 상생이라고 믿어요.
그는 실제로 이 공간을 사회적기업으로 운영하며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다.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손이 느린 대신 문틀과 창틀 안쪽까지 꼼꼼히 닦는다. 그 정성을 손님들이 먼저 알아본다고 한다. 느린 손이 흠이 아니라 강점이 되는 것이다. 낡은 건물 하나를 되살리는 일이, 그 안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의 자리를 만드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공간지기는 알고 있다.
엽연초하우스를 떠나기 전, 예상치 못한 공간을 한 군데 더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밖에서만 구경했던 ㄱ자 모양의 수납취급소 건물이었다. 현재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사무국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마침 자리를 지키던 담당자가 기꺼이 문을 열고 간단히 안내해주었다. 하차장, 배열장, 계산실, 감정실, 갱장장 등 엽연초 수납 과정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이 공간은 이제 해마다 제천 곳곳을 음악과 영화로 물들이는 장소로, 영화제가 열리지 않을 때는 ‘엽연초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 열리는 자리로 쓰이고 있다.
담뱃잎이 오가던 낡은 장소에 음악과 영화가 흐르고, 여행자의 발길과 커피 향이 스민다. 사라져 가던 것을 허물어 빠르게 새것으로 갈아끼우는 대신, 오래된 시간의 켜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 삶을 얹는 것. 그렇게 도시와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엽연초하우스가 택한 방향이자 공간지기만의 삶의 방식이었다.
#3. 우주산책
다음으로 우리는 ‘우주산책’을 찾았다. 한적한 골목 안에 자리한 우주산책의 입구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행성이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간판에는 공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써있었지만 사실 그 내용만 봐서는 뭔가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일단은 속으로 ‘카페’겠거니 정의내린 후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공간을 채운 따뜻한 색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부드러운 조명 아래 음악이 흐르고 빼곡한 책과 음반, 각종 커피 도구, 심지어 천장에 텐트가 거꾸로 달려있는 방까지… 그야말로 ‘느좋(=느낌 좋은)’ 공간이었다. 이 감각적인 공간에 우리 모두 단 몇 초만에 빠져들어 “너무 좋다~”를 연발했더랬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공간을 꾸렸을까. 공간지기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몇 개의 테이블이 더 마련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우주산책의 메뉴판이 놓여 있었는데, 보자마자 남다름을 느꼈다. 다양한 종류의 커피와 차, 와인은 물론 점성학 프로그램까지 제공되고 있는, 과거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공간지기가 직접 만든 종이 메뉴판이었다. 메뉴판이 하도 인기가 많아 손님들이 하나씩 가져가는 통에 고충이 컸다고 한다. 아홉명 분의 음료가 모두 준비된 뒤, 우리는 드디어 공간지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주산책의 공간지기는 카피라이터와 출판기획자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악과 책, 사진 등을 즐겼지만, 어느 순간 서울에서의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모든 것이 자본을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도, 치솟는 임대료 앞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유지하기 버거운 것도 그를 지치게 했다. 그렇게 지방으로 눈을 돌렸고 제천에 정착하게 되었다. 집값이 저렴하고 KTX가 있어 서울과의 접근성이 나쁘지 않은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지역에 완전히 동화되어 밋밋한 사람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한다. 지역색에 자신을 맞추기 보다는, 자기가 가진 것을 건네고 또 남에게서 영감을 받으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그렇게 문을 연 곳이 우주산책이다.
이곳을 카페라고 부르면 공간지기는 손사래를 친다. 책방이자 갤러리이자 공연장이면서,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복합적인 공간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주산책에서는 커피와 와인을 즐길 수 있고, 클래식 콘서트와 강연이 열리며, 책을 읽거나 살 수도 있다.
우주산책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별자리 기반의 점성학을 공부하던 ‘우주살롱’이라는 모임을 알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인연으로 공간지기도 함께 별자리를 공부하게 되었고, 자신이 생각보다 이타적이고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자리를 통해 자신의 기질을 알고 나니, 공간을 어떻게 꾸려갈지도 자연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메뉴판에 ‘별자리 산책’이라는 현대 점성학 프로그램이 놓인 것도 방문객들이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공간지기는 우주살롱과 함께 ‘별자리 오디세이’라는 책도 저술했는데, 별자리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찾아가도록 돕는 책이다.
공간지기와의 대화에서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은 바로 ‘선명한 취향’이다. 남이 하는 걸 비슷하게 따라하면 자신의 색이 나오지 않는다. 같은 LP를 모아도 정말 좋아서 모으는 사람과 재테크로 모으는 사람은 대화의 깊이가 다르듯이, 자기 기질과 취향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무엇을 하든 자기다운 색을 낼 수 있다고 하며, 무엇보다 자기 알맹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별자리 공부 역시 결국 자기 알맹이를 알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그는 물질에 대한 생각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여든이 넘도록 작은 돈가스집을 지키다 문닫은 일본의 노부부 이야기를 건네며,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 자체가 행복해서 그리 오래 하셨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수익이 많은 공간보다, 적은 사람이 와도 서로 많은 걸 주고받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말에서 그가 삶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주산책에서 음료를 기다리며 한창 수다를 떨던 중 노을씨가 꺼낸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속도에 맞춰 가려고 한다’는 말은 유독 이 공간과 어울렸다.
#4. 책방 소설
첫 날 일정의 마지막 장소이자 전체 여정의 네번째 공간은 ‘책방 소설’이었다. 의림지 인근의 고요한 동네에 위치한 책방 문을 열자, ‘독서는 영혼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문구가 마음 속에 꽂혔다.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벽면을 따라 다양한 책들이 조화롭게 진열되어 있었고, 곳곳에 놓인 소품들과 조명이 아늑함을 더하고 있었다. 식당도 카페도 아닌, 조용하고 멋스러운 공간 하나가 들어서자 동네 주민들이 진심으로 반겼다고 한다.
각자 조용히 책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잠깐 가진 뒤, 공간지기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공간지기가 이 책방을 열게 된 배경이 가장 궁금했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자꾸만 책과 멀어지는 게 싫어,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가까운 삶을 만들려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혹시 노후 대비냐는 물음에는 손을 저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분들이 ‘나중에 책방이나 해볼까’하며 종종 찾아오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책방은 노후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삶을 위한,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뒤로 미루지 않기 위한 선택이라고 했다. 평소엔 소극적인 편인데, 이 일만큼은 인생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다고 한다.
책방 이름이 왜 ‘소설’인지에 대한 물음표도 곧 사라졌다. 그녀가 소설을 특히 좋아하기도 하지만, 소설만이 아니라 시나 수필, 인문서 등도 결국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있어서 그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소설’은 그저 책의 한 장르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긴 모든 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책방에 진열된 책들은 공간지기가 직접 읽고 좋았던 것들 가운데, ‘지금’ 읽어도 좋은 책들만 골라 둔 것이다. 시대와 맞지 않는 책들은 제외했다고 한다. 곳곳의 소품들은 이 공간을 꾸미기 위해 한 번에 산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공간지기가 마주했던 그 당시를 기억하며 하나씩 모아 온 물건들로 하루 아침에 갖출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과거의 현재’가 살아있는 물건들이랄까. 지금의 삶을 중요시하는 공간지기의 철학이, 책과 소품 하나 하나에 배어 있었다.
나는 책방을 둘러보다 조카를 위한 그림책 두 권을 냉큼 골랐다. 책방에는 생각보다 많은 그림책이 큐레이션 되어 있었는데, 공간지기는 책방을 하면서 그림책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인연이 닿아 그림책 토론 모임을 열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그림책이 아이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간지기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해 그 취향이 서가 여기저기에 스며있었다. 지난해에는 한 북페어에서 음악을 주제로 삼은 책들만 골라 부스를 꾸몄고, 그녀만의 색이 돋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것들로 또렷이 채운 공간. 책방 소설에는 공간지기만의 고유한 색이 흠뻑 적셔져 있었다.
#5. 금수산 힐링체험센터
워크숍의 둘째날이 밝았다. 일찌감치 방문한 다섯번째 공간은 ‘금수산 힐링체험센터’였다. 역시나 이름만 봐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혹시 요가원일까? 찜질방이나 온천같은 곳인가?’ 이동하는 도중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금수산 속 구불구불 난 길로 꽤나 들어간 뒤 도착한 건물 앞에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알고보니 이곳은 미술용품을 만드는 ‘화홍산업’의 사회 환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문화체험 공간이었다. 화홍산업에서 제작하는 물감과 붓이 있어 누구든 앉아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이외에도 타자기, 카메라, 피아노, 만년필 등 공간지기가 직접 수집한 물건들을 체험할 수 있기도 하다. 마치 좋아하는 물건들을 한 자리에 모아둔 아지트 같았다. 건물 내 다른 문을 열어보니 빈백이 놓인 명상 공간이 있어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쉼의 시간도 잠시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의 체험프로그램은 조금 특별하다. 공간지기는 “이렇게 하세요.”라고 정해주는 대신 “놀아보세요. 망쳐보세요. 실수해 보세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한 팀이 예약하면 그 시간에는 다른 예약을 받지 않고, 방문객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도록 둔다. 정답과 기한이 없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속도를 되찾는다. 힐링체험센터의 ‘힐링’이라는 이름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단연 모든 이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수많은 타자기다. 공간지기가 호기심에 모으기 시작한 것이 곧 백 대를 넘겼고, 지금은 삼백 대가 넘는다고 한다. 고장난 타자기를 직접 손보기 위해 건물 아래층에는 개인 작업실까지 두었다. 90년이 넘은 독일제 타자기부터 한글 타자기까지, 저마다 다른 시간과 특징을 품은 기계들이 이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많은 타자기를 하나하나 다르게 본다는 것이었다. 같은 브랜드라도 제작 시기와 거쳐 온 주인에 따라 저마다 ‘팔자’가 다르다며, 공간지기는 타자기를 마치 사람인 것 마냥 대했다. 활자가 종이에 파고든 깊이, 무겁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 남들은 그냥 지나칠 만한 미세한 차이를 그는 오랫동안 들여다 본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 속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느린 시선이었다.
사실 타자기 수집은 그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수집 초기에는 한동안 방치하기도 했는데, 삶이 힘들어 모든 걸 잠시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이것들이 그를 붙들었다고 한다. 타자기에 쌓인 먼지를 닦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고, 그렇게 타자기의 수는 하나씩 늘어갔다. 곁에 오랫동안 두었던지라 혼자 이 공간을 지키는 그에게는 타자기들이 이제 마치 ‘동료 직원’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공간은 금수산 자락 외진 곳에 있다. 이런 곳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따로 홍보를 하느냐는 물음에, 공간지기는 일부러 홍보에 매달리지 않는다고 답했다. SNS 게시글도 띄엄띄엄 올리고, 오히려 아무나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턱을 조금 불편하게 두었단다. 정말 오고 싶은 사람들만 조용히 찾아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유명해지는 것은 그의 인생 화두가 아니었다.
“시스템에 들어가면 그 속도를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제 속도대로 살아가려고요.”
한번 확장과 성장의 궤도에 올라타면 스스로 속도를 늦추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이 공간은, 빠르게만 흘러가려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의지 그 자체였다. 느리지만 단단한 공간지기의 뚝심이 이 조용한 산자락과 꼭 닮아 있었다.
#6. 녹는점
우리가 제천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찾은 공간은 ‘녹는점’이었다. 아담하고 귀여운 간판이 걸린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공기가 느껴졌다. 음료뿐 아니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음식도 있고, 한켠에는 와인들도 놓여있었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누군가가 직접 쓴 포스트잇과 메시지 카드들이 정겹게 붙어 있기도 했다. 단순한 카페라기보다는 동네 사랑방에 초대받은 것 같았다.
미리 약속을 하고 방문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많은 음료를 준비하게 된 탓에 공간지기는 연신 땀을 훔치며 분주했다. 이윽고 음료가 모두 준비되고, 우리는 다같이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공간지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녹는점의 공간지기는 제천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서 목공 기술을 반년 넘게 배웠지만 코로나 등 여러 사정으로 이어가지 못했고, 그 무렵 알게 된 농촌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계기로 4년 전 이곳에 왔다. 처음부터 카페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제천 청년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을 꿈꿨다. 그는 농촌 살아보기 프로그램으로 이곳에 왔다가 마땅한 벌이가 없어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청년들을 여럿 보았고, 또래가 모일 만한 매력적인 공간이 있다면 그들의 정착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 계획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동네 어른들이 “여기 뭐하는 데냐”며 자꾸 물어오자, 얼떨결에 “카페에요”라고 답하게 되었고, 그렇게 카페로 굳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녹는점의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커피, 음식, 와인이 함께하는 동네 주민들의 공간이면서, 청년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고 기획하는 베이스캠프다. 녹는점은 판로를 찾기 어려운 유기농 소농 청년들을 위해 일종의 로컬 유통 거점이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건물의 이력도 재미있다. 원래는 여인숙이자 노름방이었던 곳을 지인과 함께 몇 달에 걸쳐 직접 고쳤다. 그 자리에 붙인 이름이 ‘녹는점’이다. 침대에 누워 고민하다 떠올린 이름이라는데, 제천에서의 세대 간 차이를 이 공간에서 녹여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멜팅 타임(Melting Time)’이나 중립국을 뜻하는 ‘스위스’도 후보였지만,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드는 느낌을 살리고 싶어 이 이름으로 결정지었다. 뒤이어 시작하려고 하는 텃밭 프로젝트에는 ‘생장점’이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라고 한다.
사실 ‘녹는점’의 명칭과 관련해 평면도 스튜디오 에디터들은 전날 밤 숙소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더랬다. “녹는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은 T성향을 가진 일부 에디터들에 의해 “녹는점은 몇 도인가”라는 질문으로 초점이 전환되었다. 이후 “얼음이 물로 변하는 온도가 0도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온도도 0도가 아니냐”, “그럼 녹는점과 어는점이 같은 것이 아니냐”하는 나름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공간지기로부터 녹는점에 담긴 감성적인 설명을 듣고 우리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공간지기는 녹는점을 오픈하면서 ‘굴러온 돌’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기도 했다. 타도시에서 흘러들어온 청년들의 자취방을 사진으로 찍어서 붙이기도 하고, 자칭 ‘굴러온 돌’들이 남긴 이 공간에 대한 응원의 말들을 모아 전시하기도 했다. 박힌 돌을 밀어내겠다는 패기라기보다는, 이곳에 뿌리내리고 싶은 청년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정해진 답을 좇기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청년들이 모인 곳. 누구도 정해진 답을 강요하지 않는 곳. 각자의 색채를 잃지 않고도 서로 어우러지며 더 나은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곳.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이 자연스레 섞이는 곳. 녹는점은 그런 공간이었다. 얼음을 녹이는 온도는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이곳을 나서며 깨달았다.
Outro.
무엇이든 AI에게 말하면 뚝딱뚝딱 만들어주는 요즘이다. AI는 그야말로 평균치의 기준을 높여주었다. 누가 무엇을 요청하든 그 결과물은 빠르게 도출되고 어느 정도의 기본 퀄리티를 보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다. 바로 나만의 속도, 가치, 방식, 취향… AI시대에 오히려 더 귀해지는, 자신만의 고유함이다.
서로 다른 여섯 공간이지만 각 공간지기들은 하나같이 빠르고 획일적인 길을 마다하고, 각자의 고유함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이번 제천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삶을 자기답게 살려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였다.
평면도 스튜디오가 하려는 일도 이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소비되고 잊혀지는 것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키고 실천하는 평택의 문화예술 현장을 찾아가 축적된 공간과 사람, 시간을 기록하는 일. 이것이 바로 AI로는 닿지 못하는, 우리가 이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일 것이다.
제천이 남긴 여운을 안고, 이제는 우리 곁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써내려갈 시간이다.
평면도스튜디오 에디터 만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