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과 팥빙수
Editor | 윤마디
안녕하세요. 8월 평면도 스튜디오 기록은 <여름빛 예술방학> 현장이예요. 8월 기사 기획회의 때, 시민문화팀에서 기획하신 <여름빛 예술방학> 현장을 그림으로 기록하면 어떨까 하고 의견을 주셨어요.
제가 가기로 한 2일 차 일정을 보니 오성면이라는 교외로 나간다는 것과, 어르신들을 ‘선배시민’으로 부르는 세대 교류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저도 작년에 어르신 문화향유 사업을 진행해서 어르신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그리웠거든요.
8월 13일 정오, 오성면 공간미학으로 가는 길이에요. 머리 꼭대기의 태양을 쬐며 논길을 걸어가는데 무지무지하게 덥더라고요. 얼마 전 입추라는 말에 혹해서 이제 가을일 것 같지만 어림없죠. 오늘은 말 그대로 8월 한가운데잖아요. 그래도 어느새 벼에는 쌀알이 알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요. 어쩌면 무더위 한가운데에 ‘가을’이라는 말을 툭 던져놓고, 그래 가을이야, 곧 가을이야 하며 대롱대롱 버티게 하는 건지도 몰라요. (역시나. 바로 다음 날이 말복이더라고요.)
요즘 저는 글쓰는 방법이 생겨서, 현장에서 모든 것을 메모해두지 않아요. 글자는 절묘한 말만, 그림도 당장 생생한 것만 그려두어요. 그런데 나중을 위해 모든 것을 묘사해두지 않으니 막상 기사를 쓰려고 앉으면 ‘내가 그때 뭘 봤더라’ 싶을 때도 있어요. 분명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림을 그리러 간다는 건 어쩌면 주변을 맴도는 일이기도 해요. 현장에서는 저같은 카메라들이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어요. 그럼 나는 그림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지. ‘생각아 떠올라라..’ 하고 방구석을 몇 바퀴를 돌다가.. 그동안 제가 그림을 그리며 믿어온 것이 생각났어요.
장면마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 믿음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가볼게요.
아이들은 2층에서 샌드아트를 하고, 1층에서는 엄마들이 엄마의 엄마들, 선배시민 예술가들과 모였어요.
선배시민 예술가 한 분이 마치 재즈 보컬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얘야~” 하며 구연동화를 시작하셨어요. 아이가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때 선생님의 꾸중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아이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전하는 지혜로운 엄마의 이야기였지요.
프로그램을 기획한 고민지 대리님이 ‘선배시민’이라는 말과 어르신들의 준비 과정을 알려주셨어요.
우리는 나에게 어떤 이름과 역할이 주어졌는지에 따라 그 역할을 꽤 충실하게 해내는 것 같아요. 오늘 처음 만난 어린 엄마들에게 어르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선배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오래 살아오며 알게 된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후배시민에게 전하기 위해 다시 생각하고 준비했을 거예요.
“제가 하는 얘기 속에 뭐가 들어있나 보세요”
이야기 속 아이는 유치원부터 다음 학교에 갈 때마다 선생님에게 핀잔을 듣고 돌아왔어요. 그때마다 엄마가 해주는 홈메이드 간식과 칭찬을 먹고 용기를 내더니, 일류 대학에 턱하고 합격한다는 이야기로 끝났어요.
물론 아이가 어느 대학에 가고 무엇이 되는지는 아이의 몫이겠지요. 하지만 아이가 밖에서 상심해서 돌아왔을 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몫도 분명 있을 거예요. 선배시민은 그 이야기를 네 번이나 다른 장면으로 들려주셨어요.
선배시민의 빨간 입술에서 나오는 달콤한 칭찬. 정말로 달콤한 간식을 만들어주고, 먹는 내내 등을 쓸어주었을 것 같은 분이었어요. 한 테이블에 앉은 어린 엄마들은 기쁜 손으로 연신 연잎 위에 구슬간식을 주워 담았습니다.
1층 왼쪽에서 선배시민과 엄마들이 연잎에 구슬을 만지작거리는동안, 오른쪽에서는 선배시민과 아이들이 구슬을 실에 꿰어 귀염뽀짝 장신구를 만들고 있었어요.
선배시민이 낚싯줄에 구슬을 꿰어 목걸이나 팔찌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낚싯줄은 실과 달리 빳빳하면서도 아주 얇아서 아이들의 말랑한 손으로는 잡았는지 놓쳤는지도 헷갈려요. 그러면 선배시민이 돋보기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구슬의 작은 구멍을 찾아내어 낚싯줄을 꿴 다음 아이에게 건네줍니다. 아이들은 줄 끝을 꼭 잡고 구슬을 하나씩 넣고 또 넣어서 휴대폰 손목줄도 만들고 안경줄도 만들어요.
1층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있던 계단을 올라가니 멋진 다락이 있었어요.
사실 다락은 아니죠. 이렇게 층고가 높고 햇빛을 가득 모셔오는 다락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샌드아트 영상을 보기 위해 불을 끄자 갑자기 아늑해져서 꼭 다락처럼 느껴졌어요. 1층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2층에서는 꼭 붙어 앉았습니다. 팔과 팔이 겹치고, 아이는 여기, 엄마는 저기, 아빠는 또 저기.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붙어 앉아 있어요. 이것이 공간의 미학이랄까요.
영상에서는 어르신들의 여름방학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장성한 자녀들이 데려가 준 계곡과 맛집 자랑이 이어지는 동안 큰 창문 밖에는 여전히 여름이 있어요. 아이들의 여름방학도 아직 남았고요.
연잎 팥빙수를 먹자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테이블마다 둘러앉았어요.
연잎이 이렇게 우아한 모습인 줄 처음 알았답니다. 연꽃은 호수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고고하게 피어 있으니 꽃도 잎도 풍경으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제 한아름보다 더 큰 연잎이 테이블 위에 조용히 누워 있어요. 팥빙수 그릇으로요.
이 글을 쓰면서 ‘한아름’이라고 부르면면서 팔을 펼쳐 둘러보아요. 꼭 무용수가 된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제 두 팔로 한아름 해본적이 별로 없더라고요. 몇 년 전 엄마와 덕동산 공원에 올라서 나이 많은 나무를 한아름 해봤던 때가 떠올랐어요.
요즘 평택역 주변에는 외국인이 부쩍 많아졌어요. 얼마 전 통복시장을 지날때 한 오래된 약국 옆 건물 틈에 흑인 두 명이 무언가를 한참 요리보고 조리보며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적갈색 대야에 연잎 두 장이, 가느다란 목에 대야만한 얼굴을 달고서는 용케 고개를 가누면서 그 외국인들을 요리 조리 들여다보고있던거예요. 그러더니 (아마 그 나라에선 연꽃을 못 봤을 수도 있었겠어요) 둘이 얼굴이 한결 밝아져서 코 끝으로 연잎을 가르키며 웃으며 다시 길을 떠났어요.
이번에는 어르신들이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들이 바에 가서 부리나케 팥빙수 토핑 재료를 담아와요. 한아름 연잎 위에 얼린 우유, 달디단 팥빙수 팥, 아이들이 가져온 알록달록 깨물거리들을 모두 쏟아붇고 연유를 북북 둘러준다음에, 모두가 하얀 숟가락으로 퍽퍽퍽퍽 ! 얼은 우유를 부셔요. 우아했던 연잎이 다 부셔져요. 너무 재밌죠. 여름에 연잎이 있다는걸 새삼 알게되었어요. 연잎을 이렇게 많이 가까이서 본 건 저도 처음이거든요. 통복시장에서 사는 외국인처럼요. 연꽃에 버금가는 우아한 광택에 호수처럼 깊은 색. 드레스같고 함지박같은 연잎에 팥빙수를 부셔먹으며 선배 후배 시민들이 이웃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평면도스튜디오 에디터 윤마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