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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영수증

에디터 만두

여름방학 영수증

교환・환불이 불가한 계절 한정 상품입니다

휴가라고 하면 으레 어딘가로 멀리 떠나는 걸 떠올린다. 사실 ‘휴가(vacation)’는 라틴어 ‘vacare(비우다)’에서 비롯한 단어다. 여기서 ‘비우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에게 쉴 권리가 생기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여가를 위한 여행이 널리 퍼진 것일 뿐, 휴가의 본래 개념은 장소의 이동보다 시간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있었다.
휴가의 본 의미를 떠올려보면, 어른에게 방학이란 일상을 완전히 비우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속도를 멈추고 삶을 새로 채우는 시간에 가깝다. 그 핵심은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 혹은 얼마나 오래 쉬었는지가 아니라, 그 시간을 누구의 기준으로 사용했는가이다. 미뤄두었던 일을 해보고, 가보지 않은 장소에 가보고, 새로운 것을 배워보며 일상에 나만의 작은 틈을 만든다면 그 역시 충분히 방학이 된다.
문화예술은 그 틈을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다. 낯선 작품을 마주하고, 손으로 직접 만지작거리고, 글이나 그림을 남기는 소소한 시간들은 당장의 쓸모를 묻지 않는다. 즉, 방학과 문화예술은 모두 효율의 반대편에 서서, 내 시간을 내 방식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렇게 잠시 멈춰서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휩쓸리는 동안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에 대한 온갖 물음들이 비로소 고개를 든다.
여름 한정, 교환도 환불도 되지 않는 짧은 방학의 순간들을 영수증에 담았다. 소비한 것은 물건이 아닌 틈이었고, 그 합계는 여름방학이 되었다.

영수증 파헤치기

평택 본점

#1. 안정리 공예 클래스 무사히 수료
안정리 문화학교에서 짚풀공예를 배웠다. 6월에 시작해서 7월 첫날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은 나에겐 늘 어렵기만 한 작업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짚풀을 엮는 동안은 딴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매번 뭔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꽤 뿌듯한 일이었다.
#2. 비전도서관 에세이 클래스 순항중
비전도서관에서 에세이 클래스 수강을 시작했다. 글 쓸 일은 많아지는데, 쓸수록 내 문장이 낯설고 어려움을 느끼던 참이었다. 막상 다녀보니 일주일에 한 번 내 삶을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큰 위안이 되었다.
#3. 느좋 카페 투어 4곳 도장깨기
커피냅로스터스, 시모네, 와일드그라스, 터프이너프로스터스VER2. 마침 근처에 있다는 핑계로 찾게 된 평택의 느(낌)좋(은) 카페들이다. 잘 만든 공간에서는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4. 콩국수 대탐험 2그릇 순삭
나의 힐링푸드 콩국수의 계절을 맞아 평택 콩국수 맛집 정복을 시작했다. 7월에는 밀대콩국수와 묘한콩국수를 다녀왔다. 진하고 고소한 국물 앞에서 더위를 잠깐 잊는 그 30분은 작은 여행이었다.
#5. 동네 수집 4스팟 추가
비전동, 오성면, 원평동, 합정동. 어쩌다 방문한 평택의 동네들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골목들을 산책하며 천천히 바라보고 수집하다보니 저마다 다른 얼굴이 있었다.
#6. 전시 한 모금 ₩ 0.00
어디론가 드라이브 가고 싶던 날. 가까운 평택호예술관에서 ‘A Gesture of Harmony(조화의 몸짓)’라는 이름의 누드드로잉 전시를 봤다. 몸을 공통 소재로 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그림들 앞에 서 있으니 잠깐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았다. 입장료는 무료였지만 꽤나 값진 시간이었다.
#7. 노을 구경 ∞(무제한)
서평택 노을은 7월에도 가히 명품이라 부를 만했다. 무제한 공짜로 누릴 수 있는 이 사치를 바쁘다고 그냥 흘려보내면 아쉬움x100000 일 것이 뻔해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노을을 볼 때마다 놀라운 자연에 경탄했고, 지구와 나에 대해 생각했다.
#8. 체력 충전 90.0%
달리기와 테니스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잡생각이 없어진다. 명상이 따로 없다. 운동은 물리적 체력뿐 아니라 정신적 체력도 함께 충전해준다. 어느 날은 늘 뛰던 코스를 반대로 돌다가 멋진 숲을 발견하기도 했다. 누군가 내가 그 풍경을 보길 바랐나 보다. (더위 탓에 체력 충전 -10%는 안비밀!)

안동점

#9. 안동 드로잉 워케이션 2박 3일
앞이 안보일 정도의 비를 뚫고 3시간을 내리 달려 도착한 안동에서, 그림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할말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간. ‘그림과 함께하는 삶’의 고민들을 서로 나누며 약한 연결의 힘을 가득 느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덕에, 좋은 생각과 영감을 잔뜩 안고 온 사흘이었다.

여름방학 결산서

소박한 틈이 모여, 그럴듯한 여름방학 하나가 되었다. 모두 더하니 짬짬이 그린 그림 9장과 운전거리 2,000km가 남았다. 전부 역마살 페이로 일시불 결제 완료! 🫨 대신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가 731 포인트 정도는 쌓였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방학의 순간들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서 틈을 내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누군가 곁에서 그 문을 열어주고, 함께 멈춰준다면 어떨까. 문화예술이 향하는 방향은 그 언저리 어디쯤 있을 것이다.
교환도 환불도 안 되는, 그래서 더 잘 소비한 여름방학의 순간들. 다음 계절 영수증엔 또 뭘 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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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할일 (중요!)
영수증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