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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동네를 만든다 - 그리고 책

에디터 그담

취향이 동네를 만든다 — 그리고 책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지난해에는 제대로 된 휴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는 결심했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 쉬어가자.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나’를 찾아보자. 짧은 휴가 동안 가족을 만난다는 핑계로 일본으로 향했다.

01. 도쿄에서 만나는 책책책

BOOK AND BED TOKYO 신주쿠

신주쿠 가부키초. 늦은 밤까지 화려한 불빛이 이어지는 유흥가 한가운데 조금 독특한 숙소가 있다. ‘머물 수 있는 서점’을 표방하는 북앤베드 도쿄다. 거대한 책장을 중심으로 책장 사이사이에 작은 침대가 숨어 있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다가 그대로 잠들 수 있다. 호텔의 편안함보다는 ‘책을 읽다가 잠드는 순간’을 하나의 경험으로 만든 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가부키초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바 자리와 독서 공간, 그리고 빼곡하게 늘어선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 여행자들이 정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책장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됐다. 정작 대학생 시절에도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이용해본 적이 없는데, 30대가 된 지금 다른 사람들과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간을 공유하고, 또 책이라는 취향을 공유한다는 것이 꽤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책장 사이사이에는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나마 넓은 공간을 예약했지만 정말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오히려 밖의 독서 공간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건물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신주쿠의 밤거리. 그 소란스러운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재미있었다.

02. 책의 동네, 진보초

도쿄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을 동네가 있다. 진보초.
오래된 서점들이 거리를 이루고, 헌책과 고서, 오래된 잡지와 인쇄물, 포스터처럼 누군가의 시간을 지나온 것들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이곳에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보초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작은 도자기 가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970년대 활동한 현대도예가 다카쓰루 하지메의 작은 컵 하나를 골랐다. 오묘한 청록색이 마음을 끌었다.
길을 건너면 1879년에 문을 연 전통 화지 전문점 ‘야마가타야 카미텐’이 있다.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이곳에서는 지금도 다양한 종류의 한지를 만날 수 있다.
진보초에는 이름난 출판사와 오래된 서점, 그리고 그 사이에 새롭게 문을 연 서점들이 한 거리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가게 앞에 서서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무엇이 이곳을 오랫동안 ‘책의 거리’로 남게 했을까. 책방 사이에는 오래된 가게와 카페, 작은 갤러리도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새것이 오래된 것을 밀어내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BOOK HOTEL 神保町

진보초에는 책을 읽으며 머물 수 있는 BOOK HOTEL 진보초도 있다. 층마다 다른 주제로 책을 큐레이션하고 취향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북 매칭을 비롯해 북 카운슬링, 책과 함께 술을 즐기는 북 바 등 책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험을 만든다. 북앤베드가 ‘책을 읽다 잠드는 경험’에 가깝다면, 이곳은 책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에 조금 더 가깝다.
책을 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책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 진보초라는 동네가 오랫동안 책의 동네로 남아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03. 오래된 것들이 재미있는 동네, 기치조지

기치조지에서는 책에서 조금 벗어나 오래된 물건들을 찾아 걸었다. 빈티지 숍과 오래된 소품들, 작은 가게들. 그리고 소품숍 2층에서 우연히 만난 작은 갤러리. 일부러 목적지를 정하고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공간이었다.
기치조지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이런 작은 공간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 있다는 점이다. 빈티지 숍을 구경하다 갤러리를 만나고, 골목을 걷다 책과 소품을 발견한다. 특히 늘 대형 캠핑용품점의 반듯하게 진열된 새 제품들만 보다가 오래된 중고 캠핑용품 가게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누군가 사용했던 그릇과 옷, 책과 도구들이 다시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골라지고 재정렬되어 있었다. 한 사람에게는 쓰임을 다한 물건이 다른 사람의 취향을 만나 다시 새로운 물건이 된다. 각자의 취향으로 만든 작은 공간들이 모여 결국 ‘기치조지다운’ 동네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04. 서울에도 있다, 동묘 앞

도쿄의 오래된 책과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곳이 있었다. 서울의 동묘 앞.
생각해보면 내가 동묘를 좋아하는 이유도 진보초와 기치조지에서 느꼈던 재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가에 쌓여 있는 오래된 물건들 사이를 걷다 보면 고서점이 나타나고, 누군가의 집에 있었을 법한 그릇과 가구, 오래된 책과 레코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잘 정돈된 상점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동묘의 재미는 시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금 더 걸으면 문구거리가 이어지고, 다시 수족관 거리를 만난다. 문구와 완구, 물고기와 수조가 한 동네 안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사이 오래된 중앙시장 지하에는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자리한다. 오래된 시장의 공간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면서 또 다른 시간이 쌓이고 있는 곳이다.
고서와 헌 물건, 오래된 시장과 새로운 창작 공간. 진보초와 기치조지를 걸으며 좋았던 풍경은 어쩌면 낯선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우리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취향이 뒤섞이며 만들어지는 동네를 이미 만나고 있었다. 동네가 재미있는 것은 어쩌면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05. 그리고 평택, 개인취향

도쿄에서 돌아와 평택에 새로 생긴 독립서점 ‘개인취향’을 찾았다. 소사벌 카페거리는 예전에는 나도 자주 찾았던 곳이다. 한때 카페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지금은 조금 조용해진 이 거리에 새로운 작은 서점이 문을 열었다.
‘개인취향’은 생각보다 넓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자연의 풍경 덕분인지 공간도 밝고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책장 앞에 서자 이름처럼 책 하나하나, 섹션 하나하나에서 주인의 취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컬러 스티커로 표시해둔 주요 문장과 책마다 남겨진 책방지기의 밑줄과 코멘트였다. 베스트셀러 순위나 별점 대신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며 좋아했던 문장과 생각을 따라 책을 고르게 된다. 어쩌면 독립서점의 재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책의 이 부분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
진보초에서 책을 골라 소개하고 사람의 취향에 맞는 책을 연결해주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도 한참 책장을 둘러보다 『진아의 희망곡』이라는 책 한 권을 골랐다.
‘개인취향’에서는 독서모임과 필사모임 등 책을 매개로 한 작은 모임도 이어가고 있다. 책을 사는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취향이 동네를 만든다

이번 여름 도쿄에서 좋았던 것은 유명한 관광지만이 아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만든 숙소, 오래된 책을 지켜온 서점, 오래된 물건을 모아놓은 작은 가게, 건물 2층에 숨어 있던 갤러리처럼 누군가의 취향이 선명하게 보이는 공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평택으로 돌아와 작은 독립서점의 문을 열었을 때 문득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도시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랜드마크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모으고, 소개하는 사람들. 그 사람의 취향을 궁금해하며 작은 공간의 문을 열어보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의 취향이 공간이 되고, 작은 공간들이 하나둘 모여 결국 그 동네만의 풍경을 만든다.
취향이 동네를 만든다. 이번 여름에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