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기억의 예술
Editor | 조약돌
2026년 어르신 문화향유 지원사업 ‘느린 기억의 예술학교’ - 조성연 작가와 배다리 5단지 경로당 식구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만남.
‘자화상’이라는 느린 과정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다시 꺼내 놓는다.
어느 경로당의 마지막 수업, 어르신들의 자화상
배다리 5단지 경로당에서는 마지막 수업이 끝났음에도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경로당 안은 여전히 끝난 분위기도 아니었다. 바닥엔 장지가 깔려 있고, 못 다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저마다 손을 움직인다. 각자 작업한 자화상을 보며 누가 누구인지 맞혀 보라기에 한참을 들여다봤다. 빠글빠글한 머리가 다들 비슷해서 쉽지 않을 거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주고받는다. 사진을 찍어 그 위에 각자의 기법으로 얹은 얼굴들.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가를 수 없는, 전부 다른 얼굴들이었다.
풀뿌리로 만든 붓, 그리고 우유
자화상의 바탕이 되는 종이는 한지 중에서도 삼합 장지다. 세 겹을 뜬 종이라 두껍고 질기고, 그만큼 비싸다. 천 년을 간다는 한지의 성질이 이 작업에는 꼭 필요했다. 물감으로도 해보고 여러 미술 재료로도 해봤지만 느낌이 나지 않다가, 수묵화 수업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길을 찾았다고 한다.
방법은 이렇다. 먼저 주변에서 풀뿌리를 뽑는다. 그 풀뿌리가 붓이 된다. 좋아하는 색을 풀고, 장지 위에 먼저 우유를 뿌린다. 동물성 단백질이 들어가야 색이 제대로 번지기 때문이다. 물만으로는 이 느낌이 나오지 않는다. 그 위에 손목 스냅으로 색을 뿌리면, 색이 스미고 번지면서 종이 위에 얼룩이 앉는다.
조성연 작가는 얼룩을 ‘배경지’라고 불렀다. 먹으로 번진 자리는 검버섯이 되고,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은 살면서 겪은 즐거운 일과 슬픈 일이 된다. 김태희도 자기 얼굴은 마음에 안 든다는데, 여기 계신 분들도 검버섯과 주름과 스킨톤을 마뜩잖아 하신다. 그 세월을 색과 번짐으로 다시 풀어내는 것이 이 작업의 핵심이다. 선생님은 이걸 ‘느린 기억의 예술’이라고 했다. 작가의 시각으로 이분들의 살아온 세월을 해석하는 일이다.
물을 뿌리는 동작은 다들 익숙했다. 한 어르신은 "젊었을 때부터 다리미질하면서 입에 물 머금고 뿜어 봤다"며 손에 익은 솜씨를 자랑한다. 과감하게 뿌리는 게 어렵지 않냐고 물었더니, 뭐 그게 어려운 거냐며 또 미소로 답한다.
교복을 입고, 다시 학교로
자화상에는 사진이 각자 한 장씩 필요했다. 그 사진을 어떻게 찍을지가 또 하나의 사건이 됐다.
원래는 옛 교실을 배경으로 빌려 촬영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웃다리 문화촌의 옛날 교실에 들어선 순간,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일이 커졌다. 다 같이 교복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졸업사진을 찍었다. 별거 아닌 설정인데도 그날의 시간이 오래 남았다. 사진을 찍으러 간 게 아니라 소풍을 다녀온 것 같았다고, 어르신들은 그날을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주제는 ‘길’
마지막 수업의 주제는 ‘길’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주제지만, 노인들에게는 받아들일 게 많은 단어다. 살아오신 나의 길일 수도 있고, 길에서 만난 사건과 사람일 수도 있다.
조성연 작가는 군부대에서 같은 작업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병들에게 자기 키만큼 크게 그리라고 했더니, 키가 제일 작은 친구가 길쭉한 무언가를 그렸다. 뭐냐고 물으니 도로라고 했다. 왜냐고 다시 물으니, 밖에 못 나가니까 달리고 싶다고 했다. 틀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이 먼저 했다.
마스킹 작업도 같은 결이다. 늘 틀 안에 살아온 분들에게, 틀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손으로 직접 보여주는 일. 소근육 대근육 운동도 되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픈 분들이 하나라도 더 움직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천연 염색 스카프, 그리고 패션쇼
수업의 마지막은 패션쇼였다. 직접 천연 염색한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한 사람씩 사진을 찍었다.
스카프 색은 다 자연에서 나왔다. 푸른빛은 쪽이다. 쪽은 풀이다. 여러 번 담갔다 햇빛에 말리기를 반복하면, 광합성을 거치면서 연둣빛이 점점 쪽빛으로 바뀐다. 여린 잎은 한두 번, 묵은 잎은 너덧 번 담근다. 붉은빛은 락에서 나오고, 또 다른 색은 느티나무 속껍질에서 나온다. 모든 염색은 식물성과 동물성이 합쳐져야 색이 부드럽게 앉는다.
같은 염료로 같은 천을 물들여도 묶고 접는 방식에 따라 무늬가 달라진다. 조성연 작가는 그걸 두고 "이게 자기 성향"이라고 했다. 성향에 따라 색이 나온다는 말이 묘하게 맞았다. ‘모자보다 스카프가 낫다, 미국에서 온 사람 같다, 최민수 같다’ 서로 봐주고 웃어주는 소리로 경로당이 한참 시끄러웠다.
내가 놓고 싶은 자리에
단체 작품은 규칙은 단 하나다. 각자 자기가 놓고 싶은 자리에 놓으면 된다.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내가 넣고 싶은 자리에. 남이 대신 옮겨주려 하면 조성연 작가가 말렸다. 내 거는 내가 놓는 거라고.
방향이 어긋나도, 한쪽이 자리를 많이 차지해도 상관없었다. 주제 자체가 겹칠 게 없는, 자유로운 그림이었다.
함께 차리는 밥상
수업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점심이 차려졌다. 한 달에 열 번쯤 같이 밥을 해 먹는다. 함께 먹는 일이 이 공간의 일상이다. 농촌 마을 경로당에 갔을 때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게 함께 먹는 풍경이었다. 거의 혼자 사는 분들이 각자 반찬을 해 와 나누는 자리. 오이지가 맛있다는 말에 "우리 집 거"라는 대답이 오가고, 상추를 가지러 누군가 다녀오고, 밥 더 먹으라는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미술선생덕에 두 시간이 별거 다 했다며, 다들 즐거워했다.
경로당은 왜 경로당스러워야 할까
밥을 먹으며 조성연 작가와 나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주민자치 의견을 내라기에 ‘경로당은 왜 경로당스러운가’를 주제로 적어 냈다고 한다. 학교에는 아이가 줄어도 강당을 짓고 돈을 크게 쓰는데, 노인들에게는 공부하거나 책 읽을 만한 환경조차 잘 주어지지 않는다. 높낮이만 다른 책상 말고, 앉아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상과 의자를 두는 일. 그것도 복지다. 비용도 얼마 들지 않는다.
밖에서 보이는 경로당은 대개 벽돌이거나 회색이다. 노인은 왜 회색으로만 표현되어야 할까. 마을 주민과 작가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벽면에 붙이고, 자연과 어울리는 그림으로 바꾼다면, 더는 '노인스럽지 않은' 곳으로 이미지가 바뀐다면 어떨까. 조성연 작가의 관심사는 세대 공감, 그리고 생물 다양성이다. 작은 식물도 꽃도 잡초도 우리와 다를 게 없고,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못 산다. 사람도 같다. 존재하는 것에 각자 이유가 있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유를 정의하지 않을 정도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다
이야기 끝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만났던 동네 작업들을 떠올리게 된다. 거주민과 문화예술인이 함께한 동네의 공간을 기록해 둔 작업을 보면서, 이런 일이 특별한 의도 없이도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면 좋겠다는 여운이 남는다.
‘자연스럽다’는 말. 예전엔 행위의 차원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단어 그대로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느껴진다. 잘 자라고 있는 풀을 존중하는 것. 시간이 지나 노화가 오는 것. 각자의 역량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역할을 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서 인정과 수용,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듣고 나온 기분이 든다. 12월이면 평택호 미술관에 이 자화상들이 걸린다. 살아온 세월을 색과 번짐으로 옮긴 얼굴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길을 그대로 펼쳐 보일 것이다. 이 글로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자연스러움’을 만나러 가봐도 좋겠다.
평면도스튜디오 에디터 조약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