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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여름, 안중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비 오는 여름, 안중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Editor | 그담

시장, 갤러리, 골목… 도시를 다시 그리는 사람들

“어느 비 오는 날, 평택 안중에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시장을 그리고,
한 사람은 시장을 기획하고,
또 한 사람은 시장 밖 골목을 아름답게 바꾸고 있었다.”

안중이라는 풍경

경기도 평택은 독특한 도시다.
1995년, 세 개의 시·군(송탄, 평택, 평택군)이 하나로 합쳐지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 영향인지 이 도시는 북부, 서부, 남부로 뚜렷하게 생활권이 나뉘어 있고, 지역마다 전혀 다른 표정과 속도를 품고 있다.
내가 출강 중인 현덕면은 그중에서도 가장 서쪽, 평택의 끝자락에 가까운 면소재지다.
평택 시내에서 차를 타고 30분은 족히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조용하고 오래된 동네.
내가 이곳에서 시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비 오는 날, 이 조용한 시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리고 그 만남은 내 머릿속에 세 개의 장면으로 깊이 새겨졌다.

장면 하나. 시장을 그리는 사람들

― 주민자치센터의 야외 드로잉 교실

대부분의 주민자치센터는 익숙하다.
라인댄스, 서예, 한글 교실 같은 노년층 대상 강좌들이 열리고, 그 안에서 늘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하지만 현덕면 주민자치센터는 조금 다르다.
이곳에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야외 어반스케치 수업이 열리고 있다.
“사람들이 시장 한복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했다.”
내가 이 수업을 맡게 된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면소재지에서 야외 드로잉 수업이라는 신선한 방식에 마음이 움직였다.
디지털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에,
손으로 동네를 기록하는 이 느린 방식이 오히려 더 새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수강생들의 구성이었다.
초등학생부터 은퇴한 어르신까지, 문화적으로 목말랐던 사람들이 붓과 펜을 들었다.
그날은 하필이면 호우주의보가 내렸던 날.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퍼붓는 시장 골목에 모여들었다.
“어릴 때 부터 계신 할머니가 오늘도 시장에 계시네”, “누까회관에서 사생대회 나갔었는데…”
기억이 붓끝을 따라 흘러나왔다.
우산을 쓰고, 젖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단순히 시장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동네의 시간을 복원하고 있었다.

장면 둘. 시장을 기획하는 사람

― 커피를 내리는 상인회장의 갤러리카페

안중시장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다.
장날이 아니라 그런지, 시장은 마치 숨을 죽인 듯 조용했다.
세련된 디자인의 고객쉼터가 보였지만 들어가도 되는 공간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 날, 비 내리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하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간판,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카페.
미원갤러리카페’라고 적혀 있었다.
그곳 문을 열자, 시장 상인회장인 권혜정 씨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를 내리며, 그림을 그리는 상인회장이라니.
커피 향과 시장, 갤러리라는 단어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
그 낯선 조합이 너무 근사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미술을 전공한 작가이자, 안중시장을 예술시장으로 바꾸고 있는 기획자였다.
과거 어머니가 수예점을 운영하던 공간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곳은,
지금은 시장 상인들과 주민,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예술 사랑방이자 갤러리로 거듭났다.
벽에는 그녀가 직접 작업한 드라이포인트 판화와 함께 지역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중정에는 빗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전통시장과 예술의 조합이 낯설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역의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내는 일은 언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올해부터 안중시장은 예술시장으로 탈바꿈할 예정이에요."
그녀의 말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었다.
2025년 1월, 안중시장은 중소벤처기업부의 ‘문화관광형 특성화시장 육성사업’에 최종 선정되었다.
전국 87개 전통시장 중 단 26곳만 선정된 이 사업을 통해, 안중시장은 2년간 최대 10억 원의 국·시비 지원을 받게 된다.
그녀가 주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키워드는 “머물고 싶고, 찾고 싶은 시장”이다.
갤러리와 예술 거리, 팝업스토어, 프리마켓, 공연, 상인 감성교육 등
전통시장에 문화와 디자인, 예술을 입히는 다양한 시도가 예정되어 있다.
고객쉼터처럼 조성된 작은 공간, 꽃마차 시안이 가득 붙은 상인회 사무실의 벽,
그리고 그림 한 장, 커피 한 잔에 담긴 시장의 미래 상상도.
그녀는 시장을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닌, 머무는 장소, 기억하는 장소, 예술을 공유하는 장소로 바꾸고 있다.
상인회 사무실엔 새로운 시장을 상상하는 흔적들이 가득했다.

장면 셋. 골목을 아름답게 바꾸는 사람

― 그림 그리는 주무관의 공공 미술

시장 옆 골목을 걷다 보면 곳곳에 아름다운 벽화가 있다.
처음엔 공공미술 사업인가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벽화를 그린 사람은 안중출장소 소속의 한 주무관이었다.
이름은 홍창화.
안중출장소에 기획 담당인 그는 어떤 예산도 없이, 어떤 지원도 없이,
그는 자기 돈으로 페인트를 사고, 시안을 찾아 직접 그림을 그렸다.
처음 그림의 사연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안중의 바스키아세요?"
하지만 그가 만든 골목은 진짜였다.
그는 한전함, 의류수거함, 오래된 철문에
마티스, 말레비치, 고양이 일러스트, 반구대 암각화를 그렸다.
그림마다 적힌 외국어는 지역 내 다문화 주민들을 위한 배려였다.
러시아어, 영어, 한자, 한글이 혼재된 그 그림은 다국적 도시의 인사말이었다.
“익숙한 언어 하나만 있어도, 낯선 곳이 조금은 친근해질 수 있잖아요.”
더 놀라운 건, 이 작업이 혼자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다.
문서도 기획도 없이, 스스로의 시간과 감각으로 그려낸 골목 예술.
어느새 그는, 마을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안중 구도심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의류수거함이나 변압기, 녹슨 철제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 위에는 종종 아무렇게나 붙여졌던 전단지나 불법광고물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한 장의 스티커도 찾기 힘들다.
홍창화 주무관이 직접 그린 그림 이후,
이 공간은 ‘붙이는 곳’이 아닌 ‘지켜야 할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의 미술이 단지 장식이 아니라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는 증거다.
"이상하게도요, 그림을 그려놓으니까 그 위에는 스티커를 안 붙이더라고요."
홍 주무관의 말은 단순한 소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공공의식을 움직이는 예술의 조용한 설득력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그림을 마주하며 '여기는 그냥 버려진 구조물이 아니구나' 하고
잠시라도 생각하게 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도시의 골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안중, 다시 그리는 시간

비 오는 날의 안중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용히,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장을 기억하는 사람,
시장을 기획하는 사람,
골목을 그리는 사람.
그들은 화려한 구호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마을을 다시 그리고 있었다.
잊힌 풍경, 사라진 기억, 멈춰진 도시의 숨을
그림과 커피, 실천과 감각으로 조금씩 복원해 나가고 있다.

마무리하며

이 마을의 시간이 멈춰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비 오는 날 안중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도시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취재 후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비가 그치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주무관님의 차에 두고 내렸는데,
나중에 안중 고객쉼터에서 우산을 찾았다.
접힌 우산 옆엔 조그만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 조용한 쪽지가 참 정겨웠다.
이 마을은 그렇게,
작은 마음 하나하나로 움직이고 있었다.